본문 바로가기

칼럼

정조에서 ‘정조대왕’으로

728x90

 

 

나동주∥前 영광교육장

 

1392년에 건국된 조선은 1910년 8월 29일 소위 한일합방을 끝으로 장구한 세월 동안 도도하게 흘렀던 왕조(王朝)의 물줄기가 끊긴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집니다. 518년간, 27명의 임금이 통치했던 조선 역사의 파란만장함은 오늘을 사는 우리가 늘 들춰보아야 하는 우리 민족의 고동(鼓動)치는 맥박이며, 우리들의 본모습입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57세라는 최고령의 나이로 즉위하였으며, 제3대 태종은 자발적인 의지로 왕위에서 물러난 유일한 임금이었습니다. 제5대 문종은 세자의 자리에서 자그마치 30년의 세월을 보냈고, 제8대 예종은 12세에 아들을 낳아 온 나라를 기쁨과 놀라움으로 떠들썩하게 하였습니다. 3세 때부터 책을 줄줄 읽어서 신동이라 칭찬이 자자했던 제12대 인종은 재임 기간이 겨우 9개월로 최단기 임금이었습니다.

 

또한 백성을 버리고 도망간 임금인 제14대 선조는 조선 최초의 방계(傍系) 출신 임금이었으며, 제15대 광해군은 백성을 사랑한 전쟁 영웅이었습니다. 조선 최초의 천민 출신 임금이었던 제21대 영조는 무려 52년간에 걸쳐 재임함으로써 최장수 임금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제24대 헌종은 최연소인 8세에 즉위하였으며, 대한제국 제2대 황제이며 조선의 마지막 임금인 제27대 순종은 그의 어머니가 비운의 왕비, 명성황후였습니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으로 졸지에 역적의 아들이 된 제22대 정조는 우리나라 최고의 애민군주(愛民君主)가 되었고, 지덕체를 겸비한 정조의 각별한 정치사상은 오늘의 위정자들에게도 적지 않은 본보기가 되고 있습니다. 얼마 전 어느 일간지에서 주관한 「우리나라 최고의 지도자」를 묻는 설문에서 4위 광개토대왕, 3위 이순신장군, 2위 세종대왕, 그리고 1위가 놀랍게도 정조였으며, 그 이유가 ‘백성들과 거리낌 없이 소통해서’라는 설문 결과는 다시금 정조대왕의 위대한 지도력을 실감하게 합니다.

 
정조 이산은 영조의 손자이며, 사도세자의 아들이고, 혜경궁 홍씨가 그의 어머니입니다. 11살 때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서 죽는 참혹한 모습을 목격하였으니 훗날 피의 숙청이 감지됩니다. 역사의 비극은 또 다른 비극을 잉태합니다.

 
41세의 늦은 나이로 사도세자를 얻은 영조는 그야말로 기쁨에 넘쳤고, 존재만으로도 귀하고 행복한 아들 사도세자 또한 어려서부터 천재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영특했으니 그 기대는 하늘까지 닿고도 남았습니다. 그러나 영조와 사도세자가 결정적으로 등을 돌리게 된 배경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으나 무엇보다도 ‘소통의 부재’가 가장 큰 원인이었다고 역사학자들은 이야기합니다. 이런 모든 상황을 뼈저리게 보면서 자란 정조는 소통의 중요성을 어려서부터 몸에 익혔을 거라는 예측이 가능한 대목입니다.

 

정조는 역적의 아들은 왕이 될 수 없다는 노론 대신들의 주장에 맞서지 않고 오직 공부에만 열중한 것은 그만의 생존전략이었는지 모릅니다. 역사 속의 위대한 인물들의 공통점은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새나라 조선을 디자인한 정도전이 나주지방 유배를 통해 백성들의 삶을 몸소 체험하는 기회를 가졌듯이, 정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혹시 있을지 모를 자객의 공격을 막기 위해 야심한 시각까지 깨어있으면서 공부에 열중하였으니 일석이조(一石二鳥)의 전략으로 스스로를 지켜 나갔습니다.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는 시아버지인 영조가 남편 사도세자를 폐서(廢庶)시켜 평민으로 만들어 죽이자, 그도 역시 더 이상 세자빈이 아니었습니다. 28세의 홍씨는 아들 이산을 데리고 친정에서 살게 되는 비운을 맞지만, 다시 복귀되어 영조의 총애를 받습니다. 모두가 참고 기다린 결과이니, 흘러간 역사가 오늘의 우리에게 큰 가르침을 줍니다.

궁궐로 돌아간 이산은 10년이 넘는 동궁(東宮) 수업을 받고 드디어 왕위에 오릅니다. 왕에 즉위한 첫 날 정조 대왕은 이렇게 외칩니다.


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정조실록』1권, 즉위년 1776년 3월 10일

 
사도세자의 죽음을 둘러싸고 당시 정치세력은 두 세력으로 나뉘었습니다. 사도세자의 죽음을 당연시 했던 노론 중심의 벽파(僻派)와 그 죽음을 안타깝게 여겼던 남인 중심의 시파(時派)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조는 벽파와 시파의 인물을 골고루 등용하는 탕평책을 실시하는 열린 정치세계를 활짝 열어젖힙니다. 심지어는 그의 정적(政敵)이었던 노론까지도 중용하는 혁신을 감행합니다. 240여 년 전의 그의 정치적 안목이 지금까지도 빛을 발하니, 오늘날 우리 정치의 현주소가 어떤 연유로 그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는지 깊이 새겨볼 일입니다.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으로 옮기면서 축조한 수원성은 정약용의 거중기가 등장하고 도화서(圖畵署)의 단원 김홍도 등 당대 걸출한 인물들이 참여하게 됩니다. 조선시대에는 요역(徭役)이라는 것이 있어서 국가의 큰 사업이 있으면 백성들은 무상으로 노동력을 제공해야 하는데 정조는 화성을 쌓을 때, 백성들에게 월급을 주면서 일을 시킵니다. 그야말로 애민사상의 극치로써 그 빛을 발합니다.

 

정조는 화성이 완성된 이후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환갑인 을묘년(1795년)에 대대적인 화성 행차를 거행합니다. 이 때, 단원 김홍도는 정조가 화성에 있는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을 행차했을 때 거행된 행사를 그리는데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된 환어행렬도, 즉 우리가 흔히 말하는 수원행차도를 8첩 병풍으로 완성하기에 이릅니다.

 

이 그림을 통해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일국(一國)의 임금이 행차하는 지엄(至嚴)한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그림 속의 백성들은 포복(匍匐)하기는커녕 앉아 있거나, 심지어는 옆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면서까지 그 행차 모습을 구경하고 있으니 이 기막힌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역사학자들의 해석에 의하면, 정조시대에는 그만큼 백성들의 일상이 자유로웠으며 정조의 애민사상과 소통의 정치가 낳은 조선 시대 최고의 명장면이 아닐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정조가 정조대왕으로 숭상 받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지난 11월 19일 대학생 기자단이 발표한 '2018 대한민국 대학생 신뢰지수'조사 에 의하면 ‘처음 만난 사람보다 정치인을 더 신뢰하지 않는다’는 결과가 도출되었습니다. 그저 해프닝이라기에는 너무도 부끄러운 우리 정치의 민낯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마천은 <사기(史記)>에서 ‘좋은 정치란, 국민의 마음에 따라서 다스리는 것이고 도덕으로 국민들은 설교하는 것이라 하였으며, 안 좋은 정치는 형벌로써 국민을 겁주는 것이며 최악의 정치는 국민과 다투는 것’이라 설파(說破)합니다.

 


오기(傲氣)의 정치, 아니면 말고 식의 폭로 정치, 흠집 내기 정치, 진보와 보수로 위장한 이기(利己) 정치, 전문성이 결여된 무식의 정치, 막말이 난무하는 저질의 정치, 명분 없이 옮겨 다니는 철새 정치, 탓만 하고 끝나는 대안 부재(不在)의 정치…….  날마다 우리가 보는 우리 정치의 현주소입니다.

 

정조대왕이 우리를 향해 일갈(一喝)하는 듯합니다.
“아직도 백성이 안중(眼中)에도 없으니 그 원성이 극에 달했구나!”

 

 

 

http://ihopenews.com/n_news/news/view.html?no=1514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