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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호남교육신문] 혁신전남교육 ‘백미(白眉)’ 위경종 교육국장 정년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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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임식 없이 본청에서 35년 교직생활 마무리하고 떠나
교육계 후배들 30여 명 ‘손편지’ 전달 등으로 아쉬움 달래

35년 교직생활을 본청에서 마감하며 정년퇴임하는 위경종 전남교육청 교육국장.

“위기의 시대, 학교의 교육력 회복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고는 했으나, 과연 전남교육의 부름에 제대로 화답했는지 자신이 없습니다.”

지난 2월 21일 전남도교육청 5층 상황실, 2월 말 정년퇴임을 앞둔 위경종 교육국장이  마지막으로 참석한 주간정책회의 석상에서 그간의 소회를 밝혔다. 이 자리에서 장석웅 교육감과 본청 간부들, 영상으로 회의를 지켜보는 직원들에게 짧은 소회로 사실상의 이임인사를 대신했다. 

퇴임식 없는 정년퇴임, 교직생활 본청에서 마무리

2월 21일 민방위복을 입고 마지막 이임 인사를 하는 위경종 교육국장.

장석웅 교육감은 이날 회의에서 “나는 사람 복이 많은 것 같다. 위 국장님 같은 좋은 사람을 만나 최선을 다할 수 있는 힘이 됐다”며, “위기와 기회가 공존하는 격동의 시기에 최선을 다해 전남교육을 든든하게 만드신 분”이라고 그동안의 노고를 치하했다. 오미크론의 확산에 따라 위 국장은 그 흔한 이임식조차도 손사레 치며 조용히 교직생활을 마무리했다.

조촐한 식사라도 한 끼 하자는 수많은 제안들도 극구 사양했다. 그는 교육국장직을 수행하는 2년 내내 민방위복 차림으로 한사코 본청 구내식당을 벗어나지 않으려고 애썼다. 특히 지나칠 정도로 청렴하고 절제된 그의 모습은 그를 지켜보는 이들에게 진한 인상과 여운을 남겼다.

권위를 버리고 참교육자로 살아온 삶
이렇듯 권위를 버리고 참교육자로 살고자 했던 그의 신념은 학창시절부터 내면화됐을 것으로 보인다. 위 국장은 박정희에 이어 전두환-노태우로 이어지는 암울했던 군부 독재 시절, 이 땅의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다. 1980년 전남대 사범대학 3학년 재학시절 학생회장을 맡아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구속돼 1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 받고 만기 출소한 그는 5.18 민주화운동 유공자다. 

그는 학생회뿐만 아니라 흥사단아카데미 활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우리 사회의 한계와 모순을 극복하고 정의롭고 행복한 공동체 실현을 표방하는 흥사단 활동을 통해 그는 사회가 요구하는 역할을 꾸준히 수행하고 시대정신을 구현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또한 평교사가 된 이후, 민주시민교육을 통해 생활 속 민주주의를 실현하는데 앞장섰다.

그의 이러한 이력만 놓고 보면, 그를 겪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80년대 완고한 ‘투사’ 이미지를 연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근에서 그와 함께 생활해 본 사람이라면 그에 대한 이같은 선입견은 그저 선입견에 불과하다는게 대체적인 견해다.

섬마을 선생님에서 일도의 교육국장에 이르는 35년의 교직생활
1987년 가을, 그는 신안 신의중학교 섬마을 선생님을 시작으로 2015년 2월까지, 28년이 넘도록 평교사로 교실을 지키며 아이들의 꿈을 키워왔다. 2015년 3월, 남악중학교 교감을 거쳐 2017년 봄, 강진고등학교 공모교장에 응모해 최종 임용됐다.

이곳에서 그는 2년 간 민주적인 조직문화를 이끌며 통합 거점고로서 기틀을 잡고 일반고 교육력 제고에 기여했다. 학교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지역사회의 뒷받침이 없어서는 안된다는 신념아래 그는 강진군청, 경찰서, 의회 등 지역사회와 거버넌스를 구축해 지역, 학부모, 교직원, 학생이 신뢰하고 협력하는 기틀을 탄탄하게 구축했다.

이때 그는 교육행정가로서 폭넓은 시야를 확보했던 것으로 보인다. 2019년 3월부터 2020년 8월까지 전남도교육청 교육과정과 및 중등교육과장으로 역할을 수행하다 그해 9월, 장석웅 교육감호의 두 번째 교육국장으로 발탁됐다. 정년을 1년 6개월 남겨둔 시점이었다. 평생을 교직에 몸 바쳐 온 대부분의 교직자들은 학교 현장에서 교직을 마무리하고 싶어한다.

위경종 국장도 그런 사람들 중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위기의 시대는 그를 그대로 두지 않았다. 마침내 '한 아이도 포기하지 않은 혁신전남교육'을 위해 호명됐다. 그의 발탁 배경에는 장석웅 교육감 취임 후 도교육청에서 2년간 손발을 맞춰오는 과정에서 교육철학과 신념을 공유한 적임자로 여겨졌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평소 “현장에서 신망이 두텁고 혁신교육에 대한 철학과 신념이 강하며 능력과 소신이 있는 자”를 주요보직의 발탁 기준으로 삼는 장석웅 교육감의 눈에 그가 포착된 것이다. 

2년 넘는 코로나 위기 속, 능란하게 현장 진두지휘
임용 전부터 그의 다양한 중등학교 경력과 특유의 친화력으로 현장과의 소통능력이 뛰어난 것으로 평가됐다. 그의 등장은 큰 주목을 받았다. 다만, 교육전문직원 경력이 없이 전남교육청의 핵심보직인 교육국장직을 수락하는데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는 후문이다. 특히 코로나19의 악재를 헤치고 나가야 할 순탄치 않은 짐은 그에게 버거워 보였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난 3년 간, 본청 보직 생활을 통해 그가 보여준 모습은 모든 우려가 기우(杞憂)에 불과했음을 증명하기에 충분했다. 2년 넘게 지속된 코로나 위기 상황에서 도내 1,300개가 넘는 유초중고등학교의 교육활동이 정상적으로 운영되도록 현장 방역과 등교수업 등을 진두지휘했다.

또 기초기본학력 책임지도를 위한 실효성 있는 사업을 개발해 전남교육청이 정부혁신 우수사례 대상을 수상하는데 핵심적으로 기여했다. 또한 코로나 장기화로 인한 학습격차 해소 등을 위해 교육회복 종합방안을 수립해 추진하는가 하면 학생 맞춤형 진로지도를 위한 학교 지원 체제의 구축, 고교 학점제 기반 조성, 학교 민주주의 구현, 투명한 인사 행정을 통한 학교 교육력 제고 등 호평을 받았다.

트레이드마크가 된 ‘흰 눈썹에 노란 민방위복’
교육청을 떠날 때까지 그는 노란 민방위복을 입고 있었다. 그를 상징하는 흰 눈썹은 사람들을 대할 때마다 보여주는 특유의 환한 웃음과 함께 그의 성품을 잘 대변해 준다. 

그는 평소 안치환의 ‘자유’라는 노래를 즐겨듣고 부른다. 김남주의 시에 노래를 붙인 것이다. 

“만인을 위해 내가 일할 때 나는 자유/ 땀흘려 함께 일하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다’라고 노래할 수 있으랴”라는 노래가사의 함의가 그의 성실한 삶과도 맞닿아 있다.

또한 안치환의 ‘13년만의 고백’도 그가 즐겨 부르는 노래 중 하나다.

“흔들리지 말아야 할 나의 믿음과 미련한 듯 한길만을 가야할 발걸음이/ 이렇듯 작은 유혹 앞에 휘청거리고 이렇듯 어둠속에 서성거릴 때...(중략)”라는 구절에서 그가 무엇을 품고 고민해왔는지를 어렴풋이 헤아리게 된다.

교육청에 부임한 후 그는 평소 배움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전문적학습공동체 혁신교육아카데미 활동 등을 통해 몸소 현장 교원들과도 혁신의 길을 함께했다. 또한 2022 개정교육과정 도입에 대응해 전국 최대 규모로 조직된 전남교육과정현장네트워크 회원들과 함께 구성한 ‘전남교육과정개발추진단’ 단장 역할을 수행하며 교육과정 지역화에 대비해 왔다.

지난 2월 23일 오후, 본청과 학교 현장에 근무하는 전남교육과정현장네트워크와 혁신교육아카데미 등 후배들이 교육국장실을 찾아왔다. 떠날 짐을 손수 챙기던 그는 격식 갖추는 것을 한사코 마다했다. 하지만 후배들은 그 흔한 이임식조차 없이 그렇게 보낼 수 없다며 꽃다발과 선물, 기념패, 30여 명의 열성팬들이 직접 쓴 손편지 롤링페이퍼를 전달했다.

후배들 손편지 “그의 선한 영향력에 전염돼 여기까지 함께 온 것”

2월 23일 본청과 학교현장에 근무하는 전남교육과정현장네트워크와 혁신교육아카데미 등 후배들이 교육국장실을 찾아 손편지와 꽃다발, 기념패를 위국장에게 전달했다.

후배들에게 이끌려 그는 멋쩍게 손편지 몇 구절을 펼쳐 읽는다. 대학시절 청년 그와 함께 흥사단 활동을 해온 한 후배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랄까요? 끊임없이 선배님의 실천력에 감탄하며 곁에서 배워왔습니다. 선배님의 선한 영향력에 전염돼 오늘 여기까지 닮아온 것 같습니다”라는 소회의 글을 남기기도 했다.

또 한 후배는 “시원한 흰 눈썹을 보면 삼국지에서 유비도 감탄했던 마량의 인품과 능력을 연상케 합니다. 가히 전남교육의 ‘백미(白眉)’로 부르고 싶네요”라며 “침체된 현장에 새 길을 여셨고 후배들에게는 새 힘이 되셨습니다. 혁신의 새봄이 오기 전까지는 영영 떠나보내기 싫습니다”며 아쉬움을 표현했다.

이번에 함께 퇴직하는 한 수석교사는 자신과 위국장이 ‘인생 2모작 동창생’이라고 밝히며 아래와 같은 장문의 편지를 전하기도 했다. 

“불편함을 참지 못하고 함께 길을 모색하는 일에 앞장섰던 모습들이 이제는 아름다운 추억이 되었네요. (중략) 한때는 ‘진’이 최고였다지만 이제는 ‘선’하기마저 쉽지 않은 세상, 이제는 ‘미’가 모든 것의 기준점이 되어버린 현실 앞에서 선생님의 2모작 인생길이 ‘해야 하는 일’보다 ‘하고 싶은 일’로만 이뤄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라며 애틋한 응원을 보냈다.

이어진 많은 손편지들 속에도 따뜻한 훈기가 묻어 있었다.

“양지바른 곳에 봄을 알리는 ‘봄까치꽃’처럼 멋진 삶을 시작하세요”라는 응원의 글귀부터 “(위) 위기 앞에 당당하신 모습, (경) 경사스런 일이 앞으로도 많았으면 좋겠어요, (종) 종종 그리워할래요”라는 이름 석 자 삼행시 앞에서 그는 잠시 멋쩍게 웃었다.

“푹 자고 난 뒤 자전거로 남도 한 바퀴 돌고 싶어”
아쉬움과 따뜻함이 교차된 손편지를 읽으며 머리카락을 넘기던 그는 창밖 남악거리를 내다보며 잠시 회상에 잠겼다. 이어 특유의 환한 미소를 되찾은 그는 후배들을 다독이며 말을 잇는다. 

“부족한 제가 여러분의 작은 디딤돌이 됐다면 그 것으로 행복합니다. 완전한 학교의 일상회복을 못보고 떠나는 게 못내 아쉽습니다만, 여러분이 슬기롭게 완수해주시리라 믿고 훌훌 떠납니다”

퇴임 후 제일 먼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는 “며칠 푹 자고 나서 자전거로 남도 한 바퀴를 돌고 싶다”고 말했다. 그동안 일 때문에 잠시 접어두었던 카메라 렌즈를 다시 장착하고 자전거를 누빌 태세다. 일반 사진작가 못지않은 출중한 실력을 보유한 그는 어느 산모퉁이에 놓인 야생화가 문득 남달라 보이는 삶을 누리고 싶을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걸었던 길을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을 때도 많다. 하지만 다시 태어나도 교직을 택할 것이라고 확언하는 그는 분명 참교육자다. 어떤 시인이 말했듯이, 사람들은 올라갈 때 보지 못했던 그 꽃을 내려올 때 종종 보곤 한다. 한 아이도 포기하지 않은 혁신 전남교육의 대장정에 혼신의 힘을 경주해 온 그의 하산 길에 어느 한 꽃도 소중하지 않은 꽃이 없을 것이다. 

후배들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씀 남겨달라는 당부에 그는 “부족한 내가 무슨 자격이 있겠냐”며 한사코 대답을 아꼈다. 연이은 간청에 "학생의 성장과 미래를 중심에 두는 용기와 지혜 있는 행동"을 당부했다. 자신의 평생 소신과 원칙에 부합하는 말이다. 35년 교직생활을 본청에서 마감한 위경종 국장은 그렇게 남악을 뒤로 하고 떠났다.

코로나 시국이어서 조촐한 이임식조차 못한 채 그를 보내야하는 교육 가족들의 마음은 그보다 더욱 허전했을 것이다. 그가 전남교육에 남긴 발걸음이 깊은 뿌리가 돼 끝내 아름다운 결실로 맺는 모습을 모두 함께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교육정론 Since 1986년 3월 9일 호남교육신문  http://www.ihope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16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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